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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1)

해올777 2024. 9. 17.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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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행궁

 

정조가 능원에 참배할 때 머물던 임시 처소이다. 평소에는 ㅂ사 또는 유수가 근무하던 곳으로 활용되었다. 1789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되었다. 정조는 178910,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옮긴 이후 18001월까지 12년 간 13차례에 걸쳐 화성에 행차했다. 이때마다 행궁에 머물렀다.

 

복원

 

576칸의 정궁 형태를 이룬다.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하지만 대한제국 시기에 경기도 관찰부, 수원 군청, 자혜의원, 학교 등이 자리하면서 용도 변경이 있었다. 19108월 일제강점기 이후에 낙담헌을 제외한 대부분 시설이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 정책 및 병원과 학교 건물 증개축 등으로 파괴되었다. 1980년대 말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 위원회를 구성해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 운동을 펼친 결과, 화성축성 200주년인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되었다. 200310월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이후 객사인 우화관과 별주, 장춘각을 비롯한 나머지 94칸에 대한 2단계 복원까지 마치면서 2024424, 복원이 완료되었다.

 

경기도 기념물 65호로 지정되어 있다가 200768일 사적으로 승격 지정되었다. 매주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아침 11시부터 30분 동안 무예24기 보존회가 무예 시범을 보인다.

 

구조

화성행궁은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 아래의 산기슭을 중심으로 경사지가 펼쳐지고, 시가지가 시작되는 곳의 평지에 위치한다. 구조는 앞쪽으로 긴 장방형 구조이다. 정문인 신풍루 양쪽으로 남군영과 북군영이 있다. 신풍루로 들어서면 왼쪽으로는 서리청과 비장청, 오른쪽으로는 집사청이 위치해있다. 서리청과 비장청, 집사청을 좌우로 지나 마당을 가로지르면 좌익문이 있다. 이를 통과하면 중앙문이 나온다. 이 중앙문을 지나면 화성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이 나타난다. 화성행궁과 따로이 떨어져 있는 화령전은 정조의 위패를 모신다.

 

신풍루

화성행궁의 정문이다. 1790년에 누문 6칸을 세우고 진남루라 했다. 1795년 정조는 신풍루로 고치라고 명해 조윤형으로 하여금 다시 편액을 쓰게 했다. ‘신풍이란 이름은 일찍이 한 고조가 풍 땅은 새로운, 또다른 고향이라고 한 고사에서 유래했다. 정조에게 있어 화성은 고향과 같은 고장이라는 의미로 편액을 걸게 한 것이다. 1795년에 정조가 행차했을 때 신풍루 앞에서 정조가 친히 화성부의 백성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굶주린 백성에게는 죽을 끓여 먹이는 진휼 행사가 벌어지기도 했다. 가운데 문은 어도(御道)로 임금만 지나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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